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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를 들고 읽는 이유



샤프를 들고 읽는 이유

활자를 좋아하는 사람

저는 활자를 좋아합니다. 어느 여행지를 가더라도 그곳에 적힌 텍스트를 될 수 있는 한 다 읽으려 하는 편이고, 그 내용을 이해했을 때 편안함을 느낍니다.

더불어서 활자에 예민한 편이기도 합니다. 요즘 웹페이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AI로 만든 텍스트가 여기저기 넘쳐납니다.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정말 불편합니다. 만든 사람들이 AI가 썼다는 티를 줄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 특징을 쉽게 찾아냅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읽는 행위에 꽤 큰 노력을 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읽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늘 고민합니다. 이 글은 그 고민을 정리하려고 쓰게 되었습니다.

화면 안에서 읽는다는 것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라 제 읽기의 대부분은 화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업무 문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공부하려고 읽는 글도 대부분 모니터나 휴대폰으로 봅니다.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을 찾자면 그 사이에 AI가 제 읽기 방식을 많이 바꿔 놓았다는 점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AI가 쓴 글을 자주 읽게 되고, 외국어로 된 글은 AI로 쉬이 번역해서 읽는 일이 더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제 최근 글을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저는 외국 블로그 글을 자주 읽습니다. 대부분 영어로 쓰여 있는데 예전과 다르게 Claude로 번역해서 봅니다. 물론 번역이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나오도록 제가 만들어 놓은 하네스(Harness)를 이용하는 등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책을 읽는 느낌을 내고 싶어서 번역한 글을 Obsidian으로 옮긴 뒤 명조체 폰트로 설정해 읽곤 합니다.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쓴 읽기 환경입니다.

다만 이렇게 공을 들여도 화면에서 읽는 글은 어딘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가장 큰 차이는 스크롤을 쉽게 내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문단 하나를 충분히 곱씹기도 전에 마우스 휠을 크게 돌려 다른 문단으로 넘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언가를 읽을 때 마우스는 그다지 좋은 도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몇 문단 전에 읽은 내용과 지금 읽는 문장을 연결해 보고 싶을 때도 불편합니다. 책이라면 그 내용이 있던 페이지를 대략 기억해 다시 펼쳐 보면 되지만 화면에선 그 내용이 어디쯤 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아 스크롤을 위아래로 몇 번씩 오가게 됩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그 문장 바로 옆에 적어 두는 일도 많이 번거롭습니다. Obsidian에 메모를 남길 수는 있지만 본문 사이에 끼워 넣어 기존 글을 바꾸거나 다른 노트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적으려다가 그냥 생각으로 끝나는 경우가 잦습니다.

2주의 압박

전자책도 자주 읽는 편입니다. 전자책의 편리함은 사실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전자책 단말기 하나에 여러 권을 담을 수 있고, 어디서든 꺼내 읽을 수 있고, 종이책보다 비용 부담도 훨씬 적습니다. 저는 주로 사서 읽기엔 가격이 마음에 걸리거나 아직 내 돈 주고 사기엔 고민되는 책을 전자책으로 읽습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교보 전자도서관 계정으로 책을 빌려 볼 수 있는데, 대여 기간은 2주입니다.

문제는 이 2주라는 기한입니다. 책을 빌리는 순간부터 기한 안에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부담 때문에 오히려 책을 펴지 않게 됩니다. 오늘은 피곤하니 내일 읽자고 미루다 보면 어느새 반납일이 다가와 있습니다. 그렇게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반납된 책이 참 많습니다.

사실 막상 읽기 시작해도 불편함은 남습니다. 반응이 느린 단말기에서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남기는 일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문장을 길게 눌러 범위를 맞추고 메뉴에서 하이라이트를 고르는 단계를 거치다 보면 느려터진 단말기 때문에 답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읽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동작이 아닙니다.

「독학이라는 세계」를 읽고

원래 저는 전자책으로 책을 먼저 읽고 마음에 들면 종이책을 사는 편이었습니다. 이미 읽어 보고 확인한 책에만 종이책 값을 치렀던 셈이죠.

이 습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책이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독학이라는 세계입니다. 이 책은 혼자 공부하려는 사람이라면 책을 종이책으로 사서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연거푸 합니다. 그중 마음에 가장 깊게 남은 문장은 이겁니다.

아무리 인상 깊은 책이라도 밑줄을 긋지 않고 읽으면 시간이 지나 내용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지금 당장 제가 가장 좋아하는 외국 블로거가 쓴 글을 떠올려 봐도 주제는 얕게나마 기억나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전자책 단말기로 읽었던 많은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읽었다는 사실과 읽은 내용이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다른 문제였습니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더 넓게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습니다.

AI가 일상이 된 지금은 이 고민이 더욱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바로 물어볼 수도 있고 긴 글도 몇 초 만에 요약을 받아볼 수 있습니다. 정보를 얻는 일은 그만큼 쉬워졌지만 얻은 정보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까지 쉬워진 건 아닙니다. 단순히 읽고 이해했다고 느끼는 것과 그 내용을 시간이 지나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렇게 보면 밑줄을 긋는 행위는 읽는 속도를 일부러 늦추는 일입니다. 지금 이 문장이 왜 중요한지 스스로 판단해야 밑줄을 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밑줄을 긋는 행위에 대해서도 시라토리 하루히코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책 한 권을 완독하고 긋는 게 아니다. 하나의 주제가 마무리되는 절이나 장을 다 읽은 뒤에 긋는 것이다. 그래야 쓸데없는 곳에 밑줄을 긋는 낭비를 막을 수 있다.

이런 판단을 반복하는 과정이 곧 공부이자 독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제 경험과 이 책을 통해 내린 결론은 “종이책에 밑줄을 그으며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읽기 방법“입니다. 정말 그런지 궁금해져서 직접 종이와 화면 읽기를 비교한 여러 연구를 찾아봤습니다.

관련 연구 살펴보기

생각보다 관련 연구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종이가 가장 좋은 매체”라는 결론이 쉽게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꽤 조심스러운 결과가 많아서 신기했습니다.

이 분야에는 여러 실험을 묶어 분석한 메타분석도 여럿 있습니다. 주요 결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연구분석 범위핵심 결과
Delgado 등 (2018)54개 실험, 76개 비교종이로 읽을 때 이해도가 더 높음 (g = -0.21). 설명문이거나 시간 압박이 있을 때 차이가 커짐
Clinton (2019)무작위 배정 실험 33개, 2,799명설명문에서만 종이가 우세하고 서사문은 차이 없음. 종이로 읽은 사람이 자기 이해도를 더 정확하게 판단함
Schwabe 등 (2022)서사문만 다룬 연구 32개, 2,239명매체에 따른 차이 없음
Salmerón 등 (2024)태블릿과 전자책 단말 연구종이가 약간 우세 (g = -0.10 ~ -0.11)
Li & Yan (2024)지난 20년의 연구1,000단어 미만은 차이 없음. 그보다 긴 글은 종이가 우세
Clinton-Lisell & Litzinger (2026)56개 연구, 기기별 비교스크롤이 필요하면 종이가 뚜렷하게 우세 (g = 0.35 ~ 0.48). 페이지를 넘기는 방식이면 유의한 차이 없음

표의 g는 두 집단의 평균 차이를 표준편차 단위로 나타낸 효과 크기1입니다. 정리하자면 평균적으로 종이가 조금 낫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크지 않고, 조건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차이가 커지는 조건

표를 보면 몇 가지 조건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 글의 종류: 설명문에서는 차이가 나타났지만 소설 같은 서사문에선 나타나지 않음
  • 스크롤: 스크롤해야 하는 화면에서 격차가 가장 컸음
  • 글의 길이: 1,000단어가 넘는 긴 글에서 종이가 나았음
  • 시간 압박: 대학생 14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시간에 쫓기며 화면으로 읽은 집단만 이해도가 낮았고, 시간 제한이 없을 때는 매체와 관계없이 비슷했음

이렇게 보니 번역한 블로그 글을 Obsidian에서 스크롤하며 읽을 때 이해도가 낮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긴 설명문이면서 스크롤로 읽었으니까요. 화면에서 앞 내용의 위치를 놓치던 경험은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원인이 뭘까

재밌는 점은 그 원인에 대해 연구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대표적인 설명은 네 가지 정도로 정리됩니다.

  • 매체의 특성: 화면은 짧고 빠른 상호작용에 익숙한 매체라서 긴 글도 가볍게 훑어 읽게 됨
  • 메타인지의 착각: 일부 연구에서 화면으로 읽으면 실제보다 더 잘 이해했다고 판단해 공부를 일찍 멈춘다는 설명이 있음
  • 위치 단서: 종이에서는 내용이 몇 쪽 어디쯤에 있었는지가 기억의 단서가 되지만 스크롤하는 화면에서는 그렇지 않음
  • 인지 부하: 화면의 밝기, 눈의 피로, 작은 화면 크기가 이해에 부담을 줄 수 있음

제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세 번째 설명이 가장 와 닿았습니다. 저는 아까 읽었던 내용을 다시 찾고 싶을 때 그 내용이 어디쯤 있었는지부터 떠올리곤 하는데, 스크롤하는 화면에선 그 위치가 남지 않았던 경험이 많습니다.

샤프를 들고 읽는 즐거움

요즘은 종이책을 많이 사서 읽습니다. 책이 방 어딘가에 놓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떤 책이든 제 손이 닿는 곳에 있으면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라토리 하루히코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단 골치 아파 보이는 책을 사오면 아무 데나 둔다. 책상이나 책장에 고이 모셔두는 게 아니라, 테이블이나 소파 위에 무심하게 툭 던져둔다. (중략) 그렇게 막 다루다 보면 책은 어느새 방 풍경에 녹아든다. 처음에 느꼈던 위화감과 거만한 기운이 옅어지고 위엄도 조금씩 사그라진다.

처음에는 종이책도 그냥 읽었습니다. 다 읽으면 그대로 책장에 들어가서 단편적인 기억만 남았었죠. 요즘은 샤프로 밑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를 적어가며 읽습니다. 떠오른 생각을 그 문장 바로 옆에 적을 수 있으니 생각을 넓혀 가기가 자유롭습니다. 동의하는 문장이나 의문이 드는 문장에 바로 밑줄을 그어가며 생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르면 몇 장을 넘겨 금방 찾을 수 있어서 읽던 흐름도 끊기지 않습니다. 밑줄과 메모가 남아 있으니 찾는 일은 더 쉬워집니다. 화면에서 불편했던 일들이 종이에서는 따로 애쓰지 않아도 쉽게 해결됩니다.

샤프심이 종이에 닿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도 좋습니다. 이 소리는 제가 공부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고, 책을 다시 펴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2주 안에 읽어야 한다는 부담 대신 다시 펴고 싶단 마음으로 책을 대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마치며

AI가 읽기와 쓰기의 많은 부분을 대체해 버린 시대입니다. 저도 당장 번역은 Claude에게 맡기고 대부분의 글은 화면에서 읽습니다. 이 글에서 제시한 연구 조사도 Claude와 함께했죠. 그 편리함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편리함이 커질수록 글을 읽는 속도는 빨라지고 읽은 내용이 제게 머무는 시간은 짧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책은 되도록 종이책으로 사서 읽으려고 합니다. 연구 결과에서 보듯 종이책과 전자책, 화면 사이의 차이는 크지 않을 수도 있고, 제가 종이책을 좋아해서 생긴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밑줄을 긋고 여백에 생각을 적는 동안에는 지금 글을 읽으며 제 생각이 넓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1. 연구마다 부호를 정하는 기준이 달라 절댓값으로 보면 되고, 교육 연구에서는 0.2 안팎을 작은 효과로 봅니다. ↩︎



This post is licensed under CC BY 4.0 by the author.